지난 강화도 여행은 사실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고, 그래서 정말 숙소 하나만 예약하고 무작정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오래된 이름이 있는 일, 새로운 이름을 가진 일
“저 책 만드는 사람이에요”라고 나름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었던 나의 첫 일. 페이스북 자기 소개에 ‘직업’ 란을 채울 때도, 링크드인에서 나의 ‘직무’를 채울 때도 editor는 당연히 검색 결과에 보여졌다.
LINE Developer Relations팀으로 이직한지 이제 거의 반 년이 되었고, 지난 Write the Docs 밋업 발표 준비를 하며 어느 정도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Developer Relations팀은 무슨 일해요?”라는 질문에 한 문장으로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LINE의 멋진 개발자와 개발 문화를 세상에 알리는 모든 일을 해요.”라는 조금은 추상적인 대답을 하게 된다(근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 그래서 뭘 한다는 건지 다시 물어보신다ㅜㅜ).
‘전문성’이라는 단어의 유혹
흔히들 10년을 한 분야에서 일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나 역시도 사회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다. 10년 후 쯤에는 내 이름을 걸고, 분야의 전문가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하고 경험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곳에 오고나서, 나는 나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도무지 정의할 수 없었다.
‘새로운 행사나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기획자에 가까운 것일까?’
‘사내 개발자분들의 활동을 돕고, 외부 개발자와도 소통하니까 커뮤니티 매니저에 가까운 것일까?’
‘우리의 활동을 다듬어서 외부로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으니까 마케터에 가까운 것일까?’
한 단어로 쌈빡하게(마치 ‘편집자’처럼) 내 일을 정의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새로 시작한 이 일을 잘 하고 싶은데 이 일을 잘하려면, 다시 말하자면 이 일에서 ‘전문성’을 쌓으려면 나는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인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런 생각들을 정리해서 깔끔하게 만들어야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계획이라고는 ‘노트북은 가져가지 말아야지..’ 정도였다. 심지어 짐도 출발하는 날 아침에 꾸렸는데, 분신같은 노트북은 집에 두고 갈거니까 책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놓고 묵혀놓았던 ‘일하는 마음’과 ‘모든 것이 되는 법’이라는 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첫째날 밤, 나의 숙소였던 조용한 다락방에서 ‘일하는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의 너도 충분히 괜찮아
사실 자기 계발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책에서 따라해 보라고 제시하는 방법들이 각자가 처한 상황에 꼭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깨닫고 나에게 맞는 해결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혹시 ‘일하는 마음’이 일에 대한 자기 계발서 같은 것이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 1시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일을 대하는 사람이 앞서 걸어간 길은 어땠는지 담담하게 들려줬고, 내가 앞으로 그 길을 걸어가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면 좋은지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일하는 마음’인 걸까 생각했다. 진심이 꾹꾹 눌러담긴 문장 하나하나가 위로가 되었고 너무 고마웠다. 지금의 너로도 괜찮다고, 지금의 너로도 충분하다고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전문성 말고 탁월성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전문성에 대한 나의 욕심을 내려놓게 해준 ‘탁월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이 정의해 주는 전문성 말고, 내가 세운 목표/나만의 역량/내 고유의 스토리로 엮어낼 수 있는 탁월성을 키우라고 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우연히’ 다음 단계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찾아가는 것. 전통적인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파편적 경험들을 관통하는 ‘이름’을 붙이고 말하는 것.
여행길에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내 고민의 답을 찾는 길을 발견할 줄이야.. 지금까지 나는 정해져 있는 이름으로만 나를 정의하려고 했는데, 내가 가지고 싶은 이름을 스스로 정의하면 되는 것이었다.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계속 옮겨 적고, 읽은 문장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끄적거리다가 새벽 3시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답을 찾는 길을 발견했으니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경험들을 가지고 있고 이 경험을 어떻게 엮어서 나의 탁월성에 대한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정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Write the Docs에서 발표했던 자료를 다시 봤는데 내가 정리한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가슴이 뛰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노트에 옮겨 적었다.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한 곳이며, 힘든 순간엔 결국 혼자니까 믿을 건 너 자신 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그러니 내가 넘어질 때 당신이 기다려주고, 당신이 넘어질 때 내가 기다려주겠다는, 장기적인 신뢰와 환대를 주고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학교로 볼 수 없다.
세상은 충분히 넓어서 선의와 호의에 의지해 걸어갈 수 있는 길도 무수히 많다고. 우리는 용기를 내고 그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여,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또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 호의를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나는 누군가의 시도를 응원하고 환대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이 시도하는 일이 지금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당신은 반드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고 당신이 한 일은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은 나의 일에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여행 마지막날 오전, 카페에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며 노트에 ‘여행의 결론’을 끄적거려 보았는데.. 나는 아직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머릿속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바깥으로 쏟아내고, 쏟아낸 생각들을 몇 개의 문장으로까지는 정리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나로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고 앞으로의 나를 다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하는 마음’이라는 인생의 책을 만난 고마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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