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의 어느날, 인프런 이형주 대표님(이하 쭈)에게 페이스북 메신저로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거의 4년만에 연락했던 거였는데 쭈는 잘 지내냐고 물어보고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했다. 그때 한창 LINE에서 DevDay 행사 서포트하던 중이라 행사 끝나면 만나자고 말하고 11월에 보게 되었다.
강남역 도스타코스에서 만나서 회사 얘기도 하고 일하며 사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 파이콘 준비위원회 졸업했다는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쭈한테 “아니 근데 인프런은 왜 컨퍼런스 안해요?”하고 물어봤다. 인프런만큼 기술 컨퍼런스 잘 어울리는 회사 없다고 생각해서 계속 궁금해하던 차에 물어본 거였는데 쭈가 “그쵸!!” 하시더라.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할 거면 고민하지 말고 당연히 코엑스에서 하셔야죠!” 했었다ㅋㅋㅋㅋ (미래의 나 눈감아) 쭈가 컨퍼런스하면 도와달라길래 첨에는 후원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계속 듣다보니 인프런 와서 같이 하자는 이야기였다.
쭈는 나에게 인프런에서 ‘IT 업계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사람, 연결하는 사람’으로 합류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누가 보면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 문장에 심장이 뛰었다. 완전 재미있어 보였거든. (이미 이때 넘어간 듯…)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했고 역사의 한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며 같이 셀카 한 장 찍고 강남역 개찰구 앞에서 하이파이브 하고 헤어졌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LINE 입사한지 딱 3주년되는 날이었다.
나는 왜 이직을 결정했을까
사실 쭈가 연락줄 때까지만해도 이직할 생각은 없었다. LINE에서 동료들과 잘 지내고 있었고, 평가도 좋았고 보상도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괴롭히던 한 가지 질문은 ‘내가 진짜 잘하고 있는 건가?’였다. 여기서 나에게 ‘잘한다’는 의미는 ‘내가 하는 일이 회사의 성장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고 있는지’를 의미한다. 나는 내가 열심히 노력한 일이 회사 프로덕트에 밀접하게 연결돼서, 나의 기여가 회사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회사가 성장한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누구나 알다시피 큰 회사에서는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더라.
그리고 일을 계속 하면서 느꼈던 건데 나는 ‘내가 다니는 회사만 잘되게 하는 일’보다는 ‘회사도 잘되고 내가 속한 생태계의 사람들도 잘되는 일’이 좋다. 첫 번째 회사에서 IT 책을 만드는 일을 할 때, 열심히 좋은 책을 만들어서 잘 팔리면 회사에도 좋고 심지어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서 정말 큰 보람을 느꼈었다.
DevRel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개발자 대상의 좋은 프로덕트를 제공하고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는 DevRel의 본래의 느낌보다는, 점점 Tech HR에 가까워지는 한국형 DevRel은 결국 기승전’회사 채용’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내가 바랐던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Tech HR = DevRel이라는 게 아쉽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일에서 느끼는 바는 다를 것이고, 단지 내가 일에서 얻고 싶은 보람이 그 방향은 아님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DevRel을 계속 할 거라면 LINE만큼 훌륭한 회사가 없으니 이직할 필요가 없지만 DevRel이 아닌 다른 일에 도전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최근에 새롭게 DevRel을 시작한 회사의 DevRel 매니저 분들은 서로 연결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때의 내 시야가 좁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정체되지 않고 더 많이, 더 높이 성장하고 싶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나에게 성장이란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정의를 한 적이 있다.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질문의 답은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넣는 것이었다. 항상 같은 환경에서 같은 질문에 같은 결정만 하면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을 줄 것이고, 새로운 결정을 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될테니까. 단단한 중소 기업에도 다녀봤고, 큰 IT 서비스 기업에도 다녀봤으니 이제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아주 많이 새롭게 성장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많이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높이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올해 8년차 직장인이고 3년 정도 더 일하면 10년을 채우게 된다. 직급이 있는 회사를 다녔으면 아마 과장 진급하기 전쯤 됐을 거다. 나는 팀원으로 일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팀을 리딩하며 함께 성공하는 경험을 쌓고 싶다. 그래서 매니징 업무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더 높이 성장하려면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언젠가 C-레벨이 되고 싶은데 (야망!ㅋㅋㅋㅋ) 그러려면 여러 경험을 통해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열심히 키워야한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걸 시도해본 후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기분 좋고 뿌듯하다. 예전에는 몰랐던 세상의 단어들을 알게되면서 약간 내 인생의 스킬 트리를 하나하나 잠금해제하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이직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렇게들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하나보다.
개발자향 콘텐츠와 교육
IT 도서 기획 편집자, Developer Relations 매니저, 개발자 커뮤니티 활동까지. IT 업계의 언저리에서 개발자향 콘텐츠(영상, 글, 행사 등)를 다룬지 어느덧 7년째이다. 여기서 뭔가 더 경험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교육’이랑 ‘언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커리어 목표가 딱히 있지는 않은데 저 멀리에 꽂아둔 깃발 하나 정도를 말하라면 ‘내가 속한 업계에 도움이 되는 비영리 재단 같은 곳에서 오래오래 일하고 싶어’ 정도가 있다. 그래서 현재로써는 결국 내 커리어의 끝에 ‘교육’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기 때문에 내년에 이 생각이 또 바뀔지도 모른다.
암튼 만약 내 커리어 끝에 ‘교육’이 있는 거라면 커리어 10년을 채우기 전에 관련된 경험을 쌓는 것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인프런은 IT 교육 콘텐츠 플랫폼이고 조금 다를 순 있지만 어쨌든 개발자향 콘텐츠는 내가 계속 하던 거잖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인프런(인프랩)이라는 회사 그 자체. 그리고 쭈.
‘성장 기회의 평등’이라는 슬로건을 가진 인프런은 개발자 교육 시장에서 꽤나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합류 제안 받기 전까지 사실 스타트업 생태계는 잘 몰랐어서, 작년 말에 손익분기점 맞추면서 성장했다는 쭈 포스팅 보고 ‘오 그렇군’ 정도였는데 와보니까 ‘오 그거 진짜 쉽지 않은 거였군’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밖에서 보는 인프런은 회사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따뜻한 커뮤니티처럼 느껴졌다. 개발자 교육 시장에 많은 회사들이 있지만, 업계 사람들의 성장에 대해 진심이 느껴지는 것으로는 원탑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쭈가 있었다. 언제나 솔직한 사람처럼 보였달까. 짧다면 짧은 직장인의 경험으로는 작은 회사일 수록 대표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고 생각했다. 쭈를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첫 번째 회사에서 협업했던 기억, 그리고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쭈가 대표로 있는 회사라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리고 실제로도 쭈가 입사 전에 자꾸만 회사 팀원들 진짜 좋은 사람들이라고 오면 재밌게 일할 수 있다고 좋은 동료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고 나한테 백만번은 말한 거 같다ㅋㅋㅋㅋ 와보니 이 말은 진짜 200% 사실이긴했다. 이 글 쓰다가 궁금해서 잡플래닛 우리 회사 리뷰 보고싶어서 1개월 결제해버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평점 엄청 높고 팀원들 코멘트 다들 넘 뿌듯한 말뿐인데 다 사실임. 8명밖에 안남겼는데 다들 별로 쓸말이 없어서 그런가요 껄껄
마치며
이 모든 고민을 마치기까지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이전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과 온오프라인 티타임을 네 번이나 했다. (감사합니다..)
큰 회사에서 스타트업 간다고 할 때 가족들 설득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시리즈A 단계지만 비즈니스 모델이 명확하고 실제로 아주 잘 작동하고 있었다. 최근 시장의 상황을 봤을 때 ‘IT 교육 플랫폼’이 당분간 절대 망하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ㅋㅋ 짝꿍이랑은 마이너스 통장 잔액 확인 정도 같이 했고, 친정 식구들은 항상 나 믿어주니까 괜찮았고, 감동이었던건 시아버님 말씀이었는데 뭐라셨더라 “연의 네가 가슴이 설레는 일을 해”라고 하셨던 거 같다. 정확한 워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감동받았다는 감정이 남아있으니 좋은 말씀이셨을 거다.
입사하고 이제 4개월 정도 지났다. 지난 4개월이 마치 거의 1년 정도는 지난 것 같은데,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무한한 자유와 책임 속에서 줄타기하며 운전대를 잡고 바라던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요즘. 나는 정말 살아있다고 느낀다. 부디 앞으로도 이 감정을 잊지 않고 오래오래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 !
같이 일하자고 말해준 쭈 고마워요! 사진은 내가 잘나와서! 미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